이분들은 무엇 때문에 먼 이국땅에 와서 그 많은 고생을 하였고, 가족들까지 희생을 하여야 했을까?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 먼 이국땅에 와서 치료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갈 수밖에 없음도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선교사들의 묘지를 돌아보며 비석에 쓰인 문구들을 읽어보며, 또한 변광일 간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먼저 물음표로 접근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화두를 던져 본다.
양화진. 양화진은 예로부터 국가 경영 측면에서 송파진 한강진 과 함께 삼진(三鎭) 중의 하나로 나루터의 구실뿐만 아니라 외침과 민란에 대비하여 상비군이 주둔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양화진(楊花鎭)은 오늘날 수도(首都) 방위를 위하여 중앙정부가 한강 연안에 설치한 군사기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양화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내 마음속에는 내 고향 청해진이 자연스럽게 연상되고 있었다. 청해진을 생각하며 양화진의 설명을 들으니 더 이해가 빨랐다.
그 후 양화진은 구한말에 이르러 대원군의 병인박해(丙寅迫害)로 천주교 신자의 목을 자르는 절두산(切頭山)이란 험한 흉터로 변한 수난사건의 현장으로 변하였다. 양화진은 한국의 개화를 외치며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金玉均)의 시신(屍身)을 효수형(梟首刑)에 처한 형장으로 우리나라 비극의 역사 현장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병인박해와 갑신정변이 양화진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설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료를 찾아보면 ‘절두산’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나오기에 중간 생략을 하고, 내가 보고 느낀 것만 정리를 해 본다.
양화진에는 선교사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정확한 명칭은 <서울외국인묘지공원>이며, 위치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144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555기(2004년 8월 현재)의 묘가 있으며, 최초의 피장자는 <J. W. 헤론>이라고 한다. 미얀마 단기선교를 출발하기 전에 양화진에 한번 다녀오자는 동영 형제의 의견을 듣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마침 의약품을 마련해 온 남윤경 집사와 조은희 학생까지 태우고, 나와 최승천 집사님, 안동영, 손은주 청년과 함께 한강을 바라보고 있는 양화진으로 차를 달렸다. 인터넷을 통하여 양화진 선교회 홈페이지에 접속하여 자료를 프린트 하고, 게시판에 예약을 신청해 놓았다. 양화진 선교회 변광일 간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실무자들의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차로 이동을 하면서 프린트한 내용을 읽어 주도록 한다. 남집사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차안에 울려 퍼진다.
평소 차를 타고 지나며 멋지게 지어진 건물을 보고 천주교 성당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그곳은 천주교 순교 박물관이었다. 참 멋지게 가꾸어져 있어서 보기 좋았다. 하늘이 무겁다고 아우성칠만한 날씨다. 잔뜩 흐린 날씨지만 봄기운이 함께해 주고 있으니 춥지는 않았다. 먼저 양화진 교회가 보이기에 예배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고 선교사 묘지를 돌아보려고 했는데, 예배당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본당은 허락되지 않더라도 작은 공간이나마 방문자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목발을 짚고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 교회 정문에서 문손잡이를 잡아 보니 굳게 잠겨 있었다. 헌금까지 준비해 갔는데 인솔자인 내가 민망해서 얼른 내려왔다.
차근차근 묘지들을 돌아본다. 이미 시들어 쓰레기로 변해 있는 꽃다발 몇 개가 군데군데 놓여있었다. 인생도 저러할 진데……. 아무튼, 최초의 미국 의료선교사 알렌(H. A. Allen, 1858-1932), H. G. 언더우드, H. G. 아펜젤러, J. W. 헤론 등의 묘지는 잘 정돈이 되어 있었지만, 일부 묘지들은 주인 없는 묘지처럼 초라하게 보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총 555기의 무덤이 있다고 설명을 해 주신다. 어떤 작은 비석은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죽은 아이의 것이라고 했다. 부모가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인하여 먼 이국땅에 선교를 하기위해 왔는데, 태어나 엄마젖도 제대로 먹어보지 못하고 죽어야만 했는데, 그들이 부모의 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들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 시절에는 모두가 헐벗고 굶주리며 살았기에 이 세상에 태어난다고 모두 잘 자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열 명을 낳아서 다섯만 살아도 성공이라고 했다지 않는가. 온가족이 선교사로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우리나라가 깨어나도록 많은 노력을 했던 분들도 계셨고, 처녀의 몸으로 와서 병에 걸려 순교하신 선교사님도 계셨다. 의료선교를 많이 오셨음을 알 수 있었는데 그만큼 우리나라는 가난했고 의료기술이 부족했기에 병에 걸려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사람이 참 많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의료선교는 절실했고,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도록 귀하게 쓰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선교사님들의 목숨과 바꾼 복음, 그 복음은 이제 커다란 나무가 되어 열매를 맺고 과거에 선교사님들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 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수많은 선교사가 파송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 일에 공짜가 없다.’는 말이 생각났다. 여기에 누워계시는 모든 분들은 지금 엄청난 이익을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 단 한명의 크리스천이 남아 있을 때까지는 이분들이 기억될것이고, 이분들로 인해 새로운 비전도 꿈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정말 놀랍고도 놀랍다.
이제 우리 자오에서도 돌아오는 19일 밤에 미얀마를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게 된다. 지인들은 몸도 불편한 내가 어떻게 하려고 그 더운 나라에 가려느냐고 걱정을 한다. 물론 지인들의 말도 맞다. 그분들이 걱정하는 만큼 나를 위해, 아니 이번 단기선교 팀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이니 오히려 든든하다. 양화진을 나오면서 나도 모르게 355장의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주님 함께 하옵소서.
2006. 2. 15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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