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아들과 대청소를 했다. 부자지간에 대청소를 한다고 하지만 힘든 일은 아들이 다 했다. 무거운 것을 들어 나르거나 물건들의 위치를 바꿔야 할 땐 아들이 수고를 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의자에 앉아서 정리하거나, 이 구석 저 구석에 처박아 놓았던 것을 꺼내어 정리하는 것이 고작이다. 철퍼덕 주저앉아 하나하나를 점검하며 버릴 것과 사용할 것을 구분한다. 사용할 것 중에 당장 사용할 것과 다음에 사용할 것을 구분하여 박스에 담는다. 박스테이프로 붙인 다음에 펜으로 내용물의 종류와 정리한 날짜를 적어놓는다. 그러면 다음에 필요할 때 편리하다.
제일 복잡다양한 곳이 사무실이다. 컴퓨터, 팩스, 복사기, 거기에 필요한 재료들이 많다. 서생원들이 박스에 들어가 용지에 실례도 해 놓고, 이빨이 간지러웠는지 용지들을 사용할 수 없도록 쏠아 놨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전에 필요할 때 사용해 버릴걸, 더 요긴하게 사용할 때가 있을 것이라며 챙겨놨더니 이젠 사용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서생원들은 5m 정도의 높이부터는 살지 않는다고 하던데, 다음에 사무실을 마련할 땐 높은 곳에 마련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계속 정리를 하면서 온통 다 쏟아 놨다. 아들이 그걸 보더니 “헐~” 한다. 기막히다는 뜻인지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더 늘었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깝다고 한쪽에 넣어 두었던 것들도 나오는데 이런 건 대부분 사용할 수 없다. 사다 놓고 어디다 두었는지 몰라 기억력을 탓하고 있던 물건들도 나오는데 이럴 땐 노다지 만난 기분이 든다.
우리집엔 여러 가지 차가 있다. 내가 여러 가지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나의 건강을 위해 여러 가지 차를 구해 놓고 마시라고 한다. 그러나 의지의 한국인답게 일회용 커피만 하루에 7-8잔씩 마신다. 그러다 보니 선물 받은 녹차도 보이고, 원두커피도 보이고, 인스턴트커피도 보이고, 보이차도 보이고, 알 수 없는 차도 보인다. 그런데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투명한 뚜껑이 달린 작은 용기에 국화 말린 것이 보인다. 몇 년 전에 새벽이슬 맞은 소국을 따다가 그들에 잘 말려 놓고, 좋은 임이 오시면 함께 마시리라 생각했었는데 좋은 임이 오시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다가 오늘 내 눈에 띄었다. 반갑다.
아들이 1시간만 쉬었다가 하자고 한다. 힘들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하고 싶어서 그런다. 그러자고 했더니 바로 컴퓨터부터 켠다. 나도 1시간은 나만을 위해 사용해야겠다. 차를 내리는 용기를 씻어왔다. 아들에게 뜨거운 물을 용기에 담아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녀석 게임하다 일어서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가 보다. 차를 내리는 용기에 소국 말린 것을 몇 개 집어넣었다. 작은 꽃송이들이 물속에서 피어난다. 아름답다. 이어서 국화향이 내게 스며든다. 참 좋다. 찻잔으로 마실 감성은 아직 안 되는 나는 머그잔에 국화차를 따랐다. 향이 참 좋다. 먼저 향을 즐긴 후, 한 모금 후루룩 마신다. 뜨거운 국화차가 목젖을 타고 짜르르 흘러간다. 쌉쌀하면서 잔잔한 국화차가 마음을 녹여준다.
참으로 바쁘게 살아온 세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었는데 참으로 바쁘게 살아온 삶이다. 가끔은 여유를 가지고 싶었는데, 그것은 낙서로 적어 놓은 것처럼 묻혀 버렸나 보다. 참 바쁜 삶이지만, 바쁘게 살 수밖에 없는 삶이라지만, 그래도 가끔은 가슴을 녹여주는 차 한 잔을 벗 삼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볼 필요는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는 활력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50분은 일하고 10분 동안 쉬면서 도끼날을 갈고 다시 나무를 베었던 어느 나무꾼처럼 말이다.
2008. 2. 27.
-양미동(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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