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꽃보다/사랑하는 아들아

[아들아.... 87] 가을 운동회

자오나눔 2007. 1. 15. 11:36
십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닐 때가 있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축복 속에 마음껏 자연과 벗하며 자랄 수 있었던 시절, 검정 운
동화는 중학교 입학 기념으로 신었던 그때.
그때 나이 8살 초등학교를 가려면 산을 한 개 넘어서 중학교
를 지나가면 조금은 거리가 단축되었기에 그 길을 이용했다. 그
때도 아마 이렇게 날씨가 좋았나 보다. 아니 더욱 맑고 높고 푸
르렀다. 만약에 하늘을 쇠붙이로 때려 볼 수만 있었다면 옥소리
보다 더 맑은 소리가 났으리라.
그때의 운동회는 시골 전체의 축제일이다. 학생과 시골 주민
이 어울려서 근사한 하모니를 연출해 내는 정말 아름다운 축제였
다. 마을마다 농악대가 앞장서고, 학생들은 청 백으로 나눠서 열
심이고, 마을을 대표한 청년회에서는 마라톤 선수로 나간 청년이
1등 상품으로 받은 밀가루 한 포대로 동네 잔치를 베풀던 풍요로
운 그때가 있었다.
매일 전답에 나가 허리가 휘도록 일만 하시던 어르신들은 그
날만큼은 일찍 소에게 꼴을 먹이고, 돼지에게 푸짐하게 밥을 주
고, 집안 단속을 해 놓은 다음에 팥밥을 하고 계란을 삶아서 운
동장으로 나오곤 했다. 마을 대표로 나간 선수들이 승전보를 전
해 오면 탁배기 한잔 걸치고, 패보를 전해와도 아깝지만 내년에
는 이기자며 위로를 할 줄 알던 풍요가 있었다.
행여 그 운동회에서 마을이 우승이라도 할라치면 밤새 마을은
축제를 벌리곤 했다. 장작불을 피워 놓고 가을 하늘의 밝은 달을
벗삼아 꽹과리와 징이 소리를 울리고 장구를 맨 아저씨는 신나게
묘기를 부리곤 했다. 흥에 겨워 즉석으로 각설이 춤을 추던 나이
지긋하시던 어르신을 보며 평소 근엄하시던 분이 저렇게 변할 때
도 있구나라고 의아해 하던 그 시절....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그
리운지.....
그날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와 선배들이 다니던 중학교에서
같은 날 운동회를 했다. 명칭은 우리들은 운동회 중학생들은 체
육대회, 똑 같은 것이었지만 체육대회라니 너무나 거창하게 보이
던 그 시절. 아침 일찍 검정 고무신을 신고 청군을 상징하는 청
색 모자를 쓰고 학교를 가기 위해 산을 넘는다. 산을 내려가 중
학교 운동장을 지나는데 그때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 소
리... 딴따단 딴딴~ 딴따따 단 딴 따단~~(꼭두각시 음악)이 어깨춤
을 추게 만들고 있다. 아직은 아무도 오지 않는 운동장 가운데에
서 검정 고무신이 벗겨 진 줄도 모르고 춤을 춘다. 정신없이 풍
악에 맞춰 춤을 추는데 어떤 아저씨도 같이 춤을 추고 있다. 서
로가 한 번 씩 웃곤 한참을 추었나 보다. 그 어르신이 내 머릴
쓰다듬으며 "고놈 맹랑하네 몇 학년이냐?" "네 나이는 8살인데
학교 1년 빨리 들어가서 2학년이에요?" "허허~고놈...." 머리를 쓰
다듬어 주시던 그분이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었음을 나중에 알고
얼마나 부끄럽던지......
오늘은 준열이와 조카가 다니는 학교에 가을 운동회 구경을
가 본다. 그때와 다름없는 만국기는 하늘을 수놓고 있지만 그때
의 가을 하늘 만국기가 더욱 그리운 건 왜 일까. 그때 보다 호화
로운 프로그램이 행해지고 있었지만, 그때의 아기자기한 순서들
이 눈에 아른거림은 왜 일까.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호객 소리와
상품들은 그때 보다 훨씬 좋아졌지만 잘게 썰어 놓은 수박 한쪽
에 100원하던 그 상인들이 그리운 건 왜 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