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그리고/나눔의 문학

[수필] 흔한 것과 귀한 것

자오나눔 2007. 1. 16. 13:40
     우리들의 삶은 의식주가 있어야만 살 수 있다. 모두가 넉넉하면 좋겠지만 우리들의 현실은 넉넉함보다 조금은 부족한 듯 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사람의 욕심이야 끝이 없겠지만 약간 부족한 듯 살아가노라면 인간의 정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소중한 마음이 넉넉해지기 때문이다. 의식주가 꼭 필요하지만, 그 중에서 허름한 집이라도 불편 없이 살 수 있고, 집이 없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허름한 옷을 입고도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고, 때로는 아이들은 옷을 입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지만,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서는 부족하거나 없다면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가뭄이 들고, 홍수로 인한 가난과 기근에 시달려야 했던 우리의 조상들을 어릴 적부터 보며 자라 온 4-50대의 기억 속에는 언제나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마음껏 먹어 보는 게 소원이라는 말을 자주 들으며 살아온 기억들을 지금 자라나는 세대에게 말을 하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지 왜 배고프게 살았어요?"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래도 우리들은 없는 살림이지만 어려운 이웃과 나누며 살아온 조상들을 보며 자라왔기에 나누는 것에 익숙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귀한 것을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부모님들도 손님 대접하는 것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고, 손님 섬기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살아 오셨다. 누가 자기 집에 찾아오기로 한 날이면 미리부터 무언가 준비를 하셨다. 귀한 손님이 오시면 잡아 드리려고 키워온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앞마당에 놀고 있던 암탉은 그 날 저녁 밥상에 올라오는 것을 자주 보며 자라온 우리들인지라, 지금도 손님 대접하는 것을 귀하게 생각하며 행동으로 옮기고 있으리라. 가난하게 자라온 농부들의 자녀들은 가난이 싫고, 농사짓기가 싫다며 거의가 객지로 올라가 버리고 몇몇의 청년이라고 있는 분들도 거의가 4-50대인걸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도 꿋꿋하게 고향을 지키며 객지에 나간 고향 사람들이 모처럼 고향을 찾아오는 피서철이나 명절 때면 마음이 설렌다는 그들의 고백이 순수하기만 하다.

     내 고향은 靑山島(청산도)라는 섬이다. 지금은 서편제 촬영지로 더 유명해져 관광객들이 심심하지 않게 찾아온다고 한다. 진도 아리랑을 신나게 부르며 올라오던 돌담이 있는 진흙 길, 허름한 초가집에서 목이 터져라 창을 부르던 대목을 촬영한 곳이라면, 아하~ 할 정도로 눈에 익은 곳이 내 고향이기도 하다. 고향의 인심은 참 넉넉하다. 이웃집에 누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면 반가움에 마실을 온다. 비록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은 아니지만 내 손님처럼 반가워하는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웃집에 마실을 올 때면 작은 것이라도 손에 들고 온다. 함께 나누려는 소박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정이 간다.
     남들이 다 객지로 떠났어도 고향을 지키며 작은 어선으로 고기를 잡으며 살고 있는 친구가 있다. 모처럼 고향에 내려간 내가 전화를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며 금방 마실을 오겠다고 한다. 친구가 직접 잡아온 생선으로 회를 떠서 찾아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와 저녁식사를 한다. 그때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흔하디 흔한 회만 가져와서 미안하네. 이곳은 섬이라 누가 생선을 가져와도 그렇게 반가운 것은 아니라네. 그런데 다른 좋은 것을 대접하려고 했는데 마땅치 않아 우선 회를 떠왔다네. 산 너머에 지인에게 3만 원짜리 토종닭을 간곡하게 부탁을 해 놨으니 연락이 오면 한잔하세……."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육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생선회는 귀한 것이다. 그러나 섬사람들에게는 흔한 게 생선이다. 낚시만 던지면 언제든지 잡아먹을 수 있는 생선…….
   
     그 순간 떠오르는 것은 어릴 적 추억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어릴 적 추억을 한 두개는 가지고 있다. 그런 추억이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들의 삶에서 가끔씩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다시 용기를 갖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가난하게 살던 우리 집에 서울에서 친척이 찾아왔었다. 그분은 국회의원 비서관을 하던 분이라 시골 어르신들이 보기에도 정중하게 대접을 해야 할 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님은 집에서 기르던 토종닭이 낳았던 계란으로 요리를 해 드렸었다. 그때 시골에서 계란 한 개는 귀중한 가정 용돈 대용으로 사용하고 있을 때이다. 그 날 저녁상에는 우리가 평상시 먹던 해초로 만든 반찬이나, 생선류는 없었다. 우리들은 참 귀한 계란과 닭 요리가 올라왔기에 군침을 꿀꺽 삼키고 있었는데, 그분은 그 저녁상이 반갑지 않은가 보다. 맛있게 잡수시기는 하는데 하시는 말은 다르다. "숙모님, 닭이나 계란은 서울에서 날마다 먹는답니다. 그런데 해초나 생선 요리는 흔하지 않답니다. 내일부터는 숙모님이 평소 잡수시던 반찬으로 주세요. 섬에서 흔한 것이 육지에서는 귀하답니다."
     내가 흔하다고 해서 상대방도 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가장 귀한 것은 그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토종 음식이라는 것이다. 흔한 것을 대접한다고 미안해 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것을 정성껏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대접하려는 정성이 그대로 포함된 음식은 마음까지도 푸짐하게 만든다. 말 한마디조차도 맛있게 들리는 고향, 고향은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날마다 느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서 좋다. 섬기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내 고향의 따뜻한 사랑을 배우는 날이다. 모두가 사랑이다.

     1년에 4번씩 7년째 소록도 한센병 자들에게 봉사를 다니고 있다. 물론 몸이 불편한 나는 회원들을 인솔하여 가는 역할만 할 뿐이지만, 소록도에 가서 그곳 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 못지 않게 나도 크다. 소록도에는 호박이 흔한 편이다. 심어만 놓아도 잘 자라는 호박이라 노동력이 없는 그분들은 호박을 심는다. 손가락 마디가 다 떨어져 나간 조막손으로 연장을 잡고 호박구덩이를 파고, 거름을 넣고, 다시 흙을 덮은 다음 그 위에 호박씨를 심어 놓는다. 그러면 싹이 나고 한여름 무럭무럭 자라서 늦여름부터 호박은 누런빛을 띄며 익어 간다. 자선음악회나 자선 바자회를 하여 기금을 마련 한 후, 그분들이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여 내려가면, 그분들은 어김없이 호박을 내어놓는다. 당신들에게 가장 흔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신들 스스로 노력하여 키운 호박이란 것을 알기에 참으로 소중하다. 흔한 호박 몇 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남겨 놓았다가 챙겨 주시는 그 사랑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손가락이 없는 조막손으로 호박을 부등켜 안고 와서 우리들 품에 안겨 줄 때면 우리들은 모두의 가슴으로부터 눈물이 치밀어 올라오고 있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흔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에 사랑이 들어 있으면 참 귀한 것이 된다. 그 마음까지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는 퍼주고 또 퍼줘도 마르지 않는 정이라는 샘물이 있다. 참으로 흔하고 흔하다. 그러면서도 귀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 흔하면서도 좋은 정을 마음속에만 담아 놓고 퍼 줄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흔한 것을 깊숙이 저장해 놓고 꺼내지를 못하고 있으니 어느새 귀한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짜 소중한 것이 무언인지를 알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 소중하다. 비록 시커먼 기름때를 씻지도 못하고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는 모습 속에서도 정을 느낄 수 있는, 삼겹살과 김치찌개에서도 산해진미보다 더 행복한 밥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나 혼자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부족하더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소중한 마음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귀한 일인가.
     사람들은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먼저 내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굳게 닫아걸고 있는 빗장을 풀어야 한다. 내 마음의 빗장을 풀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진실한 사랑도 할 수 없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변하고 만다. 끊임없이 두드리며 다가오는 소중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안타까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열자, 마음의 문을 열자,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 빗장을 시원하게 부셔버리자. 다시는 빗장을 걸 수 없도록... 그리고 하늘을 보자, 밝은 햇살이 우리를 비추고 있다. 하늘을 보자.


2002.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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