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31일. 이날은 내게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아내와 진짜 부부가 된 날이기 때문이다.
결혼식은 99년 5월 1일에 양측 부모는 참석하지 않고, 자오나눔선교회 가족들 300여분을 모시고 아내가 내 휠체어를 밀고 식장으로 입장하였고, 이규환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이 잘 치러졌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던 것은 아내와 나에게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 부잣집 둘째 딸인 아내는 이혼 후 딸 하나 잘 키우며 12년째 혼자 살고 있었고, 처갓집의 모든 일을 도맡아서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다가 나를 만나서 결혼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지체1급 장애인이고, 아들하나 딸린 가난뱅이 홀아비였으니 처갓집 식구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장인 장모님께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것은 사위란 놈이 다섯 살 어리고, 성격이 긍정적이고 무슨 일을 결정하면 놀라운 추진력을 가지고 해결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장인 장모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었고, 처갓집 식구들은 아무도 식장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미리 정보를 알고 있었기에 나도 집안의 어르신들은 참석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드렸었다.
그렇게 결혼식은 끝났고 아내는 없는 자식으로 치부가 되어 가난뱅이 남편과 참 어렵게 살아왔었다. 그래도 꿈이 있었기에 웃을 수 있었다. 나눔의 사역을 해 나가며 봉사갈 물품을 마련하기 위한 돈이 없으면 주저없이 파출부도 나갔던 아내다. 서로 위로하며 용기 주며 꿈을 키워 나갔고, 언제나 기도로 그 일을 준비해 나갔다. 그런 와중에 아내는 처갓집을 가끔 들리게 되고, 결혼은 했더라도 혼인신고는 올리지 말라는 장인 장모님의 말씀을 수용하게 되었다. 처음 몇 년은 불안하기도 하고 속도 상해서 아내와 다투기도 많이 했는데, 그것도 세월이 지나니 무덤덤해 졌다. 혼인신고 안한다고 내 아내가 남의 아내가 될 것이 아니기에 그냥 뒀었다. 그러다 사위와 딸이 주변 사람들로 인정을 받고 칭찬을 듣게 되자 서서히 마음을 열어 주시는 장인과 장모님이셨다. KBS 1TV ‘이것이 인생이다.’에도 딸과 사위가 나오고, 하고 있는 사역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으니 더 좋으셨던가 보다.
장애인 시설인 ‘자오쉼터’를 건축해 놓고 장인 장모님도 함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들이 계시면 우리의 사역에 지장이 된다며 부천으로 다시 이사를 가셨다. 그렇게 일은 정리가 되고 나눔의 사역도 점점 지경이 넓혀져 갔다. 주민등록등본을 떼어 보면 아내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아들 준열이와 함께 살고 있는 장애인들이 동거인으로 올라있다.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기다렸다. 사역을 하다 보니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는 권면을 자주 들었다. 꼭 필요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목회자가 되는 게 싫어서 모른 체하고 내 사역만 열심히 해 왔다. 아내는 내게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마친 후에 목사님이 되는 것이 사역을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며 권면을 한다. 내가 싫다고 했더니,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삶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 수 있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면을 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세월은 지나가고 장로회 신학대학원에 입학 원서를 낼 날짜가 다가오는데, 필요한 서류들을 본 아내는 혼인신고부터 해야겠다고 한다. 서류에는 이혼한 사람에게는 조금 불리하게 느낄 정도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렇게 하여 아내와 결혼 7년 만에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다. 서류상에 나타난 부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었는데 혼인신고를 해 놓고 보니 이제야 내 아내라는 생각이 든다. 여태껏 연인으로만 살아왔나보다 우리 부부는…….
2005. 10. 31 -나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