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생전 처음으로 단 둘이 피아노 연주회를 다녀왔다. 경기도 화성에서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소극장을 찾아간다는 것은, 그것도 저녁 7시30분까지 도착해야하는 그 시간은 고통이었다. 차들이 가는 건지 안가는 건지 감각을 잃어버릴 정도로 혼잡한 서울의 밤 거리였다. 그 와중에도 운전석에 앉은 아내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했다. 참 많이 바쁘게 살아온 것은 맞지만 그래도 중년 부부의 오붓한 시간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다. 나를 위한 시간은커녕, 우리를 위한 시간을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다는 사실이 나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미로를 뚫고 지나가듯 그렇게 도착한 압구정동에 있는 소극장 발렌타인. 클래식과는 담을 쌓은 지 십 수 년이 지나버렸으니 ‘윤효간’이라는 어려운 이름의 주인공을 알 리가 없는 우리 부부. 지하 2층의 소극장까지 계단으로 내려가는 길이 목발을 짚고 가는 나로는 쉽지 않는 코스였다. 그래도 앞자리를 찾아 내려간다. 앞자리는 ‘금 자리’라는 고정관념이 앞으로 인도한 것 같다. 아무튼 오늘이 499회 공연이라고 했다. 499회의 공연이 있기까지 수많은 공연들이 앞에서 이루어졌으리라. 488번의 경험이 쌓여서 499회라는 멋진 공연이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알 수없는 기대를 하도록 했다.
윤효간. 그를 처음 만난 건 조명이 꺼지 어두운 무대였다.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고, 나는 객석 맨 앞자리 좌측 구석에 앉아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 그를 보려고 고개를 �빗 내밀며 마흔일곱의 나이답지 않게 설레고 있었다.
피아노의 여러 가지 굉음과 함께 허스키한 목소리로 부르는 비틀즈의 Hey Jude. 그의 광기어린 피아노 연주를 보고 들으며, 내 생에 참으로 멋진 감동을 주었던 영화 <포미니츠>가 생각났다. 두 손을 묶을 순 있어도 음악까지 막을 순 없어 자유가 허락된 시간 4분. 그 4분 동안에 연주하는 그 피아노 소리, 그의 몸 울림은 수많은 관객은 물론이요, 그를 잡으러 왔던 군인들까지 기립박수를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영화 포미니츠. 그 영화에서 받았던 감동을 윤효간님이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하고 있는 <피아노와 이빨>에서 고스란히 받았다.
피아노와 이빨이라는 타이틀이 정해지기까지는 에피소드가 있었단다. 이름을 정하기 위하여 스탭진에게 설문지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25가지의 제목이 뽑혀서 왔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더란다. 그래서 피아노는 넣고 그 뒤에 뭔가를 넣으려고 생각하던 중, 사람의 몸에서 제일 오래도록 남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고, 그렇게 정한 것이 이빨이란다. 처음에는 ‘피아노와 이’였는데, 그것이 좋지 않다고 하여 <피아노와 이빨>이라고 정했다는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참 이빨이 좋네…….’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참 잘한다는 말이다.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이빨 잘 깐다.’라는 은어를 사용해 온 시대를 살았기에 ‘이빨’이라는 단어가 친숙했다. 윤효간,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정말 말 되게 이빨을 깐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틀에 짜인 방법으로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라는 물음표를 전제로 정해진 틀이 아닌 새로운 방법을 끊임없이 시도해 나가는 개척자 정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잘하는 연주’ ‘감동이 있는 연주’ ‘끝까지 살아남는 연주’ 이 세 가지로 표현을 해가는 인생. 그 인생이 멋진 인생임을, 이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임을 깨닫게 한다.
그의 연주를 들은 독일 사람들이 말하길 “한국에 이렇게 멋진 클래식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며 찬사를 보냈다는 우리나라 동요. 그중에 몇 곡을 들려준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오빠생각’ ‘마법의 성’을 들으며, 정말 한국 고유의 멋진 클래식이 있었다는 새삼 알게 되었다. 동요를 편곡하니 그렇게 멋진 클래식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윤효간.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공연을 보고 나는 음악이 진동임도 새삼 알았다. 수많은 청중을 울리고 웃기고, 카타시스까지 느끼게 하는 것은 멋진 웅변이 아니라, 살아있는 음악임을 새삼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을 찬양할 땐 단순하게 노래라 악기로만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온 몸으로 드리는 찬양이 가장 아름답다. 윤효간의 피아노 연주를 보고 듣다 보면, 온 몸으로 연주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다못해 거친 숨소리까지도 멋진 연주가 되고 있었다. 그의 연주는 피아노 줄의 가느다란 떨림이 끝나는 순간에도 아직 멈추지 않고 있었다. 가느다란 피아노 줄의 떨림이 끝나고, 꼴깍 하고 관객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크게 들리는 정적 속에서도 그의 연주는 이어지고 있었다. 숨을 참다가, 참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컥! 하고 기침을 할 때쯤 가장 작은 소리는 가장 큰 소리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며 연주는 끝나고 있었다.
이럴 때 내가 잘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근사하다. 멋지다.’ 그것이었다. 근사함의 최고봉이었고, 멋짐의 최고봉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이 모두 돌아갈 때까지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건물 입구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 주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사람다운 사람이다. 내가 근래에 정말 근사한 사람을 만났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중간에 이벤트 시간에 가장 멀리서 오신 분 손들라고 하기에 손들고 화성이라며, 별나라 화성이라고 말했더니, 경기도 화성이냐며 말 된다고 나오라고 하여, 이승훈의 공연티켓과 아내를 위한 여성 용품까지 선물로 주는 섬세함도 보여 주었다. 나오며 시디를 두 장 사서 사인까지 맡으며 행복해 했던 멋진 저녁이었다.
2008. 2. 29.
-양미동(나눔)―
'나와 너, 그리고 > 자유 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영화 ‘포미니츠’를 보고 (0) | 2008.03.02 |
---|---|
[스크랩] 행운이 집에 들어오다. (0) | 2008.03.01 |
펄펄 눈이 옵니다. (0) | 2008.02.25 |
그 한마디 말에 (0) | 2008.02.19 |
아내는 생일이고, 아들은 졸업이고 (0) | 2008.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