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에 부천에서 살다가 이곳 화성에 터전을 잡기위해 답사를 왔었다. 우리가 구입할 임야 곁에는 낡은 폐가가 한 채 있었다. 양철 지붕이 듬성듬성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다 부서진 문짝은 바람에 부딪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해 보였다. 뜨거운 태양은 여전히 이글거리고 있었고, 폐가 앞마당에 심겨져 있던 은행나무에는 은행이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바로 그 곁에 초라한 고목이 앙상한 가지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는 것처럼 펼치고 있었다. 대단한 용기를 가진 할아버지가 지게 작대기로 하늘 향해 삿대질을 하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그 초라한 고목이 결코 고목처럼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는데,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목에 꽃이 핀 것이 아니라 고목을 휘감아 올라가며 주렁주렁 넝쿨을 내려놓고 새색시 볼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꽃 이름이 능소화였다. 아내를 해 주시던 어르신께서 들려준 능소화의 전설은 지금도 선명하게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다.
옛날에 소화라는 예쁜 궁녀가 있었는데, 어느 날 임금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은 소화는 하룻밤 사이 빈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날 이후로 임금은 소화를 찾지 않았다. 임금을 기다리다 지쳐 결국 소화는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을 뜨면서 유언을 했는데 "담장 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라는 애달픈 유언을 남긴 채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 이듬해 여름, 소화가 살았던 처소의 담장을 덮으며 주홍빛 꽃이 넝쿨을 따라 주렁주렁 피어났는데,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는 듯,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듯 피었는데 그것이 능소화다. 옛날에는 양반집 앞마당에만 심을 수 있어서 양반 꽃이라고도 불렸다. 화관이 통째로 떨어져 낙화의 순간까지도 고운 빛깔과 형태를 간직한 채 내려앉음으로서 의연한 기품을 잃지 않는 꽃이다.
아무튼 마을 어르신께서 들려 주셨던 능소화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자오쉼터를 건축하면서 능소화를 심고 싶었다. 폐가에 있는 능소화를 캐다가 심으려 했는데 어느 날 폐가를 철거하며 중장비가 모두 밀어 버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쉬웠다. 마을에 내려가 보았는데 몇 집에는 능소화가 있었다. 거기서 한 뿌리 얻어다 심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언제든지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는 생각이 있어서인지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다보니 다른 일에 신경을 쓰면서 능소화를 심어야겠다는 생각을 까마득하게 잊어 먹고 있었다. 봄이 오면 다른 나무와 꽃들은 심으면서도 능소화는 잊어 버렸다. 마치 임금이 소화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며칠 전에 지인을 차에 태워준 적이 있었다. 능소화를 심기 위해 두 뿌리를 구했다며 자랑을 했다. 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는데 차에 능소화 뿌리가 그대로 있었다. 지인에게 챙겨 드린다 하면서 나도 깜박 했다. 결국 집에까지 가져오게 되었다. 본의는 아니지만 말이다. 뿌리가 말라버리면 살아나지 않을 듯싶어 자오쉼터에 심기로 했다.
차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내려왔다. 물론 비닐봉지에는 능소화 뿌리가 들어 있다. 인선씨께 삽을 가져와 달라고 했다. 능소화를 심자고 했다. 수돗가 곁에 커다란 소나무 바로 옆에 한 뿌리를 심었다. 다른 한 뿌리는 개나리 울타리 우거진 곳에 우뚝 솟은 소나무 옆에 심었다. 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지인의 이름으로 능소화 두 뿌리를 자오쉼터에 심었다. 지인에게는 대신 화분이나 한 개 사드려야겠다. ^_^*
올해는 능소화를 구경할 수 없겠지만 내년 여름에는 붉게 타오르는 태양 같은 열정의 능소화를 볼 것이라는 기대를 해 본다.
2008. 4. 12.
-양미동(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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