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봉사 가는 날에 소록도 한센인들의 숙원이었던 소록대교가 개통이 된다고 연락이 왔다. 15년 동안 봉사를 다니면서 배만 타고 소록도에 들어갔는데 이젠 차를 타고 간단다. 봉사를 가고 봉사를 마치고 나올 때에도 배시간에 허덕이다 보니 마무리를 다 해주지 못하고 나올 때가 많았는데 이젠 넉넉하게 해 드리고 새벽녘에라도 철수할 수 있으니 감사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소록대교가 개통됨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소록도를 왕래할 터인데 소록도의 청정을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다.
평소 하던 대로 소록도 봉사갈 준비를 하고 출발했지만 마음이 설렌다. 이젠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것보다 소록대교 개통하는 날에 소록대교를 건넌다는 것에 설렘이 있다. 마음 한구석에는 배를 운행하면서 살았던 분들은 이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하는 걱정도 생긴다. 선주야 배를 팔거나 보상을 받았겠지만 선원들을 누가 챙겨주겠는가. 아무튼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된다. 어차피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봉사라는 것이 많은 인원이 참석해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그 봉사할 량에 따라 거기에 맞는 인원이 투입되어야 좋겠다는 생각이다, 일감은 많지 않은데 너무 많은 사람이 참석을 하여 빈둥대고 있으면 그것도 보기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일에 맞는 적당한 인원이 참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물론 전문가는 반드시 포함되어야겠지만 말이다.
이번 봉사는 11월에 설치해 드린 정수기 11대에 필터를 교환해 드리고, 어르신들이 몸이 불편하기에 재봉 봉사를 하기로 했다. 마침 커튼가게를 운영하셨고 과거에 양품점까지 하셨던 분을 소개 받았다. 재봉틀 일에는 일가견이 있는 분이다. 정수기는 김집사님이 전문가이니 당연히 동참을 한다. 과거에 나름대로 재봉틀 일을 해 보셨다는 분들이 가고 싶어 했지만 여건이 허락지 않았다. 춘천서 후리지아님이 과거에 해본 실력으로 보조라도 해 드리겠다며 춘천서 출발하셨다. 태안서 이선생님이 전문가를 대표해서 참석을 하신다. 혹시 목수 일도 필요할지 몰라 영천에서 김 선생님이 동참을 하셨다. 나? 나는 그냥~! ^_^* 아무튼 이렇게 다섯 명이 참석을 했다.
도착하자 바로 기도만 한 후에 팔을 걷어 부친다. 떡을 다섯 말 해 갔는데 어르신들이 활동하기 어려우니 마련해간 비닐봉지에 일정하게 담아서 차로 배달부터 한다. 부드러울 때 드시라는 배려다. 석 달 만에 만나는 어르신들인데 무척 반가워하신다. 여전히 손가락들을 누가 가져갔는지 보이지 않지만, 살갑게 손을 내밀어 반가워하는 그 마음에 덩달아 포옹까지 하게 된다. 손가락이 없어지고 발가락이 없어지고 코가 문드러진 것이 그들의 의지가 아닌 불가항력에 의한 것들이었기에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떡을 다 돌린 후에 간단하게 점심을 해 먹고 바로 재봉틀이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한다. 차에 싣고 간 재봉틀보다 더 좋은 재봉틀이 마련되어 있었다. 누군가 봉사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이란다. 금방 옷들이 쌓인다. 지퍼가 고장, 단추를 잠그기 힘드니 찍찍이를 달아 달라는 주문, 옷이 크니 줄여 달라는 내용, 치마로 몸빼 바지를 만들어 달라는 내용 등, 옷은 찢어지지 않았지만 작은 부품들로 인하여 입거나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가 대부분이었다.
할머님 한분이 고운 치마를 가져 오셨다. 처음 젊어서 소록도에 걸어 들어오실 때 입었던 치마란다. 한센병을 꼭 고쳐서 다시 그 한복을 입고 소록도를 떠나리라 생각하며 버리지 못한 세월이 벌써 40년이란다. 이젠 눈도 잘 안보이고 다리도 의족이고, 손도 조막손이니 치마를 입을 수가 없단다. 그러면서 몸빼 바지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하신다. 가슴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단련되었기에 소록도에 가서도 씩씩했었는데 목젖이 뜨거워졌다. 치마를 포기하지 못한 세월이 40년이었다. 그만큼 건강에 대한 바람이 컸다는 증거이리라. 우리들은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 힘들어 한 적은 없을까? 생각하니 참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버려야 하는데도 버리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할 말이 없었다.
그 사이에 다른 팀은 정수기 필터 교환을 해 주고 있다. 구북리 이장이신 이용화 집사님이 안내를 하고 김집사님과 김 선생님이 필터 교환을 하고 있다. 필터 교환이라 설치보다는 훨씬 시간을 작게 잡아먹는다. 모처럼 마을에 활기가 넘치는 듯하다. 베트남 새댁 소망씨는 전도사님 오신다고 일도 안 갔단다. 그래도 일가시지 그랬냐고 말을 하면서도 참 감사했다. 아내가 살았을 때 언니 언니하며 참 잘 따랐고, 우리 가족과 살갑게 지냈던 소망씨다.
어느새 하루해가 다 저물었다. 김집사님이 저녁을 준비해 주신다. 가져간 살과 김치, 녹동항에 나가서 구입해 온 삼겹살과 채소들이 맛있는 음식이 되어 상에 올라온다.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한다. 잠을 자지 못하여 다들 피곤해 하신다. 그 사이에 토론이 벌어졌다. 이선생님과 김 선생님이 아직 예수를 모른다기에 또 다른 열정이 일어난다. 참 많은 이야기를 들어 드리고, 많은 설명도 해 드렸다. 궁금한 것이 참 많으신 김 선생님, 그의 주장은 흉악한 살인범들이 회개했다고 어찌 천국갈 수 있느냐는 강한 부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토론의 시간이 행복했다. 어쩔 수 없는 예수쟁이의 본능이 밤 깊은 줄 모르고 토론을 하게 한다.
새벽 3시에 예배당으로 나갔다. 소록도 어르신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 주는 것도 봉사라며 이선생님과 김 선생님도 깨워서 참석하도록 한다. 남장로님이 일찍부터 오셔서 기도를 하고 계신다. 소록도 어르신들은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기도하시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해 기도할까? 라는 궁금증이 생긴 적이 있었다. 나라와 민족, 육지에 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소록도에 봉사 온 분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대답을 듣고 참 많은 감동을 받았었다. 롬 12장의 말씀으로 새벽 예배 설교를 하시는 소록도 연합교회 당회장 목사님의 말씀이 큰 은혜였다.
아침을 먹고 부지런히 서두른다. 각자의 자리에 가서 봉사를 하게 한다. 이 집사님과 함께 소록도를 방문한다는 분들을 마중 나갔다. 거문도에 들어갔다가 풍랑이 거세서 나오지 못하고 있단다. 오후나 내일쯤 섬에서 빠져 나오면 소록도에 들어오겠단다. 일정에 차질이 생겼다. 조금 일찍 소록도를 철수해도 될 상황이 되었다. 재봉틀 봉사 현장에 가보니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김동월 할머님이 내 손을 잡으며 너무나 반가워하신다. 눈도 희미하게 보이고, 손목 이하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무릎 이하로도 의족을 신었다. 나는 섬김을 조금밖에 하지 못했는데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내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씀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과연 얼마나 저 할머님을 위해 기도했나……. 참 미안했다. 현충일에 또 오겠다며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눴다. 숙소에 와서 짐을 차에 싣고 소록도를 떠났다. 이번에는 소록도에서 신혼부부 두 쌍이 함께 동행을 했다. 서울에서 일도 봐야하고 잠시라도 자오쉼터에 들려 섬기고 가겠단다. 이미 가족처럼 익숙해진 우리들이라 자연스럽다. 출발! 소리와 함께 페달을 밟는다. 자~ 가자 집으로!
2009. 3. 6.
-양미동(나눔)―
'봉사중독 행복전염 > 봉사 댕겨 왔슈~' 카테고리의 다른 글
4월에 나는 얼마나…. (0) | 2009.04.14 |
---|---|
왜 그랬을까… (0) | 2009.03.17 |
소록도, 그분들을 생각하며 (0) | 2009.02.24 |
모두 사랑의 대상이다. (0) | 2009.02.11 |
꿈에 본 내 고향 (0) | 2008.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