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에 처음으로 긴소매 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반소매로 새벽길을 나서자니 너무나 어색합니다. 결국 긴소매 옷을 입었더랍니다. 아직은 반소매 옷도 괜찮다고 버텨 보려 해도 한복 입고 장화 신은 것 같아 어색합니다. 역시 제철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하는가 봅니다. 긴소매 옷을 입으니 온 몸이 포근해집니다. 올 가을은 유달리 짧을 거라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긴소매 옷도 낙엽 색깔이 짙게 배인 것입니다. 갈색 세상에 뚝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왠지 풍요롭습니다.
사무실에 나오면서 만난 풍경이 있었습니다. 리어카에 판자를 몇 개 싣고 은행 앞으로 오는 노신사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리어카를 끌었던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은행 앞에 리어카를 세워 놓고 야전 침대 두 개를 꺼냅니다. 조심스럽게 야전 침대를 조립하더니 그 위에 판자를 올려놓습니다.
멋진 좌판이 차려집니다. 판자를 옮기던 노신사는 검정 비닐 봉투에 가득 담겨 있던 물품을 건드렸습니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서 그 물건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여자 스타킹이었습니다. 스타킹 올에 판자가 긁고 지나갔는가 봅니다. 그분은 좌판에 양말을 펼쳐 놓고 팔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좌판을 차릴 생각을 하지 않고 스타킹 올만 조심스럽게 손질하고 계셨습니다.
그대 내 좋은이여.
아직까지 그 노신사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의 발을 따뜻하게 해 주려는 소중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분이 양말을 많이 팔았으면 좋겠습니다. 애서 태연해 보이려는 듯 휘파람을 약하게 불던 모습이 겨울을 가까이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대 내 좋은이의 가을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가을도 행복할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2001.9.25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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