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그리고/나눔의 문학

[수필] 내가 가는 길의 끝은

자오나눔 2007. 1. 16. 12:50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그 사람이 스스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활 속에서 과거를 생각하는 기회가 자주 있을 때라고... 모처럼 집에서 여유로운 저녁을 보냈다. 아내의 설거지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리고, 설거지를 마치고 타온 한잔의 커피가 더욱 마음을 여유롭게 해 주고 있었다. 유달리 뉴스를 좋아하는 나는 텔레비전을 켜면 뉴스를 하는 곳이 없는가 하며, 리모콘 버튼을 눌러 보는 게 취미로 변할 정도가 되었다. 유선방송국에서 틀어 주는 영화 채널에서 서편제를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서편제에 시선이 고정되고 마음은 벌써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 멀리 언덕에서 황톳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세사람. 등짐을 멘 아버지(김명곤)를 가운데 두고, 흰 저고리 검은 치마에 가방을 멘 딸(오정해)과 북을 든 아들(김규철). 세사람의 느릿한 걸음은 아버지가 선창하는 진도아리랑에, 화답하는 딸의 노랫가락이 흥을 더하며 이내 활기를 띈다. 시무룩하던 아들도 언덕을 내려오면서 어느덧 힘있게 북채를 잡는다. 화면 안에 콩알만하던 세사람은 이제 화면을 가득 메운다. 온통 푸른 보릿물결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시뻘건 황톳길. 흥겨운 노랫가락에 장단을 맞추며 아스라이 길떠나는 소리꾼 가족.... 영화 <서편제>에서 가장 명 장면으로 꼽히는 진도아리랑 장면이다. 이 장면은 물경 5분40초 동안을 롱테이크 (길게 찍기)로 잡은, 길 장면의 압권이다. "본디 그렇게 찍을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장소가 너무 좋아서 그렇게 바꿨지."라는 임권택 감독의 설명처럼 장소가 너무나 아름답다. 그곳이 내 고향 청산도 이다.

  우리들은 길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어머니의 태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순간부터 아늑한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을 길을 가게 된다. 누구에게나 길은 희망이 될 수 있고, 절망이 될 수도 있다. "길이란 본디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다님으로써 생겨난 것"이라고 루쉰은 말했다. 내가 소록도에 봉사를 갈 때마다 들리는 전시실에는 시인 한하운님의 사진과 함께 그의 시가 벽에 걸려있다. '보리피리'와 '전라도길'이 있는데 그 전라도 길에 보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는 대목이 나온다. 아마 한하운 시인은 길을 절망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 희망의 길, 절망의 길, 크게 나누면 두 개의 길이 있다. 누구나 희망의 길을 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희망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람은 작은 부분에서도 감동을 받는다. 온통 푸른 보리 물결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시뻘건 황톳길. 흥겨운 노랫가락에 장단을 맞추며 아스라이 길떠나는 소리꾼 가족이 부르는 진도아리랑을 들으며 내 마음은 감동의 물결을 만나고 있었다. 잠시 정착한 곳에서 이루어진 만남은 또 다른 감동을 만들어 간다. 앞이 보이지 않는 누나와 그 누나를 바라보며 북채를 잡는 남동생,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알아 볼 수 있었다. 누나의 소리와 동생의 북 장단이 만나서 가장 아름답게 불려지는 심청가 대목의 한을 보면서 눈물이 흐른다. 해후... 동생과 누나의 해후. 그리고 다시 이별. 기다리던 사람끼리 모르던 사람처럼 헤어질 수 있는 이유는 한을 풀었기 때문이다.

  통하는 것...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정이다. 갑자기 추억을 더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고향의 흔적을 찾아서 앨범을 넘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앨범에 담겨져 있다. 그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을 나는 보며 자라왔다. 그 길을 내가 다시 걸어가고 있다. 내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어려운 길이라도 희망을 갖도록 하자. 가시밭길이면 가시를 걷어 내면 평탄한 길이 된다. 내가 가는 길이 내 후손이 간다는 마음으로 우리들의 인생 길을 멋지게 가보자. 나는 스스로 내 마음을 다스려 본다. 비록 추억을 먹으며 살아가는 삶일지라도 내가 가는 길의 끝은 희망이라고.

  2002.1.22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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